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이쇼 덴노 (문단 편집) === 유년 시절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다이쇼 천황 유년기.jpg|width=300]]}}}|| || [[1892년]]의 다이쇼 천황 || [[메이지 덴노]]의 측실인 [[야나기하라 나루코]]의 소생이었다.[* 메이지 덴노에게는 5남 10녀중 다섯 번째 자녀이자 3남이었고, 야나기하라 나루코에겐 2남 1녀중 세 번째 자녀이자 2남이었다.] 당시 고셋케(오섭가) 출신의 정실이었던 [[쇼켄 황후]](하루코)에게는 자녀가 없었고, 다른 측실 소생의 아들 네 명은 줄줄이 사망하여[* [[메이지 덴노]]는 원래 5남 10녀를 두었는데, 그 중 1남 4녀만이 살아남았다.], 사실상 요시히토가 메이지 덴노의 외아들이 되는 바람에 [[서자]]임에도 불구하고 후계자가 될 수 있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습진을 앓은 데다가 뇌막염까지 걸릴 정도로 병약했으나 기적적으로 죽지는 않았다.[* 이때 보수적이었던 메이지 덴노는 서양의학 대신 전통의학으로 치료할 것을 고집했다.] 그러나 이때문인지 성인이 되어서는 물론 죽을 때까지 건강이 좋지 않았다. [[1880년]] [[11월 1일]](1세)부터 황실의 전통에 따라 부모와 떨어져서 [[메이지 덴노]]의 외조부인 나카야마 다다야스의 집에서 자라게 되었다. 그동안 친부인 메이지 덴노는 요시히토의 양육에 거의 간섭하지 않았고 관심도 없었기에 만나지 못했다. [[1885년]] 3월 다시 [[고쿄|황거]]로 돌아왔으나, 역시 메이지 덴노는 자식들을 거의 보지 않은 데다가, 생모인 [[야나기하라 나루코]]도 만나질 못했으며, 형제들도 대부분 어릴 때 죽고 없어서 요시히토는 외로운 유년 시절을 보내야 했다.[* 네 명의 여동생들이 있었지만 그녀들은 전부 부황의 다른 측실인 [[소노 사치코]]의 자식들이었고, 떨어져 지내서 사이가 가깝지는 않았다.] 1887년 메이지 덴노의 정실 부인인 [[쇼켄 황후|하루코 황후]]의 법적인 정식 양자가 되었고, 황실 예법에 대한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어릴 때 생모를 만나지 못해서 하루코 황후가 생모인 줄 알고 자란터라, 몇몇 사람들이 생모가 따로 있다는 사실을 말해도 좀처럼 믿지 않으려 했다고 전해진다. 1887년 9월엔 가쿠슈인([[학습원]])에 입학했으나,[* 이때 요시히토는 군용가방을 매고 등교했는데, 이게 현재의 [[란도셀]](ランードセル)의 유래라는 얘기가 있다.] 가쿠슈인의 엄격한 규칙에 적응하지 못했고 건강도 안 좋았기 때문에 백일해에 걸려 휴학하고, 1889년부턴 아타미나 하코네에서 요양하며 건강 회복에 힘썼다. 동년 11월엔 《[[황실전범]]》의 제정과 동시에 황태자가 되었으나 가쿠슈인에서의 성적이 나빴고[* 독서와 [[승마]]에는 능했으나 이해력과 상황 판단 능력이 모두 떨어졌기에 특히 이수계 교과를 힘들어했다고 한다.] 1894년에 결국 중퇴했다. 가쿠슈인을 중퇴한 이후, 아카사카 별궁에서 개인 교습을 받아 [[프랑스어]], [[한문]], 국학(유교학)을 배웠다. 이즈음 모토오리 도요카이로부터 국서와 한시를 배웠는데, 문학에는 상당히 흥미를 보였으며, [[와카]](화가)와 한시를 취미로 즐겨 많은 한시를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개인 교습에서도 요시히토는 잘 적응하지 못했다. 결국 [[메이지 덴노]]는 [[이토 히로부미]]의 제안을 받아들여 요시히토의 양육과 교육을 담당할 인물로 방계 황족인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의 마지막 당주로 다이쇼 덴노의 셋째 며느리였던 [[다카마츠노미야 키쿠코]] 비의 외할아버지였다.]를 임명했다. 이후 요시히토는 다케히토로부터 학문을 배웠는데, 성적은 중하-하상 정도로 좋지 못했다고 한다. 1889년 고작 10세의 나이에 [[일본 육군]] 소위로 임명되었다. 15세때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히로시마]] 대본영에 참여했고, 16세에 대위로 진급했다. 18세에는 [[귀족원(일본)|귀족원]]의 의원으로 임명되었으나, 이러한 것들은 상징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메이지 유신 이후 1945년 패전 이전까지 남자 황족은 자동으로 귀족원 의원이 될 수 있었고, 네임드 황족들은 일본군 장성을 겸했다.] 이렇듯 다이쇼 덴노는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데다가 형제도 없었고, 또래와의 교류도 거의 없이 자랐으며, 9세때부터 육군 중장 소가 스케노리로부터 교육을 받으면서 매우 엄격한 규칙 아래 생활해야 했다. 이래서야 정상적인 정신상태를 바라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당연히 어리고 병약한 데다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던[* 다이쇼는 집중력이 떨어진 데다가 침착함도 없었다고 한다. 또 생각한 것을 입 밖으로 바로 말하는 버릇도 있어서 항상 아버지에게 혼이 난터라 모자라단 느낌을 주기 충분했다.] 다이쇼 덴노가 이러한 생활을 버틸 리가 없었고, 결국 교육 계획 대부분이 폐기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